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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부모님만 찾아 뵙고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리우올림픽 영웅' 펜싱 금메달리스트 박상영이 고향 경남을 찾았다. '금의환향'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방문이었다.진주 출신 박상영은 19일 자신의 모교인 경남체고를 시작으로 경남교육청, 경남도체육회, 진주시청 등을 차례로 방문해 응원해준 도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날 오전 경남도체육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상영은 "아직 젊다. 더욱 열심히 해서 더 좋은 선수로 거듭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17일 귀국한 것으로 안다. 진주에는 언제 왔나."오늘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집에서 늦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 그래도 먼저 고마운 분들을 찾아 뵙는 게 도리인 것 같아 아침부터 인사하러 나왔어요."-어머님이 돌아오면 맛있는 것 사주고 싶다고 하셨는데?"엄마는 맛있는 것 사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저는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가 제일 그리웠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맛있는 것 사드려야죠. 그래도 맛있는 것 사주신다면 오늘 저녁 기대해 봐야죠. 허허."-출국 때와 달리 귀국할 때는 주변 반응이 완전히 달랐을 텐데."저는 이번 올림픽에 출국할 때도 많이 설렜고요. 귀국할 때는 다른 연유로 많이 설렜어요. 공항에서부터 많은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외쳐주시고 알아봐 주셔서 얼떨떨했어요.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격려 글도 많이 올라오고요. 너무 감사하죠."-경기를 하면서 '할 수 있다'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는데 당시 심정은?"지난해 무릎 십자인대수술을 받고 재활 훈련할 땐 금메달 목에 거는 장면을 수없이 머릿속에 그리면서 견뎌냈습니다. 그렇게 꿈에 그렸던 것이 잘 못하면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라 절박했죠. 어린 시절부터 힘들 때면 습관처럼 속으로 '할 수 있다'고 다짐을 했는데 너무 절박하니까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아요. 다들 기적을 이뤘다고 하는데 저는 가능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환대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을 보면서 대단한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19일 경남도체육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상영.-'할 수 있다' 신드롬이 형성되면서 국민 주문이 됐다. 어떻나."'할 수 있다'라는 마인드컨트롤은 힘들 때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니어도 청년 취업난을 비롯해 지금 우리 주변에 어렵고 힘든 상황을 겪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 또한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어려움을 헤쳐나갔으면 좋겠어요. SNS에 모르는 분들이 큰 힘이 됐다는 글을 많이 올려 주십니다. 저의 금메달이 그분들에게 힘이 된다면 제가 더 감사하죠."-정순조 코치께 고등학교 때부터 금메달 두 개가 목표라고 했다는데 앞으로 포부는."지금 금메달은 저의 인생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4년 뒤에는 마음의 짐이 돼서 돌아올 것을 잘 압니다. 그래도 무거워하지 않고 기회가 된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금메달 땄다고 흔들리거나 거만하지 않고 마음 다잡아 새롭게 시작해서 더 좋은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펜싱선수이기 이전에 경남을 대표해서 더욱 훌륭한 선수로 거듭나겠습니다."-경남체고에 세워지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흉상 1호가 되는 기분은."1호라니 개인적으로 큰 영광입니다. 후배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줬으면 좋겠고요. 대신 후배들이 더 열심히 해줘서 제 흉상이 외롭지 않게 옆에 쭉 줄을 서줬으면 좋겠습니다. 허허."
16.08.22.오랜 기간 한 분야에 전념하여 그 일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대중들은 그런 뛰어난 이들을 특별시 하며 '장인'이라 부른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흥식(79) 연주가는 65년을 아코디언에 몰두한 아코디언 장인이다. 악보도 보지 않은 채 3000여 곡의 음악들을 연주하는 그에게 장인이라는 표현은 무척이나 어울린다. 피아노는커녕 리코더도 다루지 못하는, 음악의 문외한이 만나는 음악 장인은 어떤 모습일까? 남다른 소리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 아코디언 장인을 만나봤다.김흥식 연주가는 뛰어난 연주 실력 외에도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중 하나는 고령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외견이다. 시간이 날 때면 산을 오른다는 그는, 작년까지 있었던 '똥배'가 쏙 들어갔다며 건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캐주얼하고 밝은 분위기의 복장도 그가 10년은 더 젊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일까."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기자님은 술, 담배 하시나요? 저는 술이랑 담배를 무지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배도 나오고 몸도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산을 오르내리면서 체력을 길렀어요. 무지하게 골초였지만 담배도 끊었죠. 술이요? 술은 못 끊겠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체력을 길러선지 술을 마셔도 힘들지는 않아요." 김흥식 아코디언 연주가.오랜 기간 음악에 몰두하며 살아온 김 연주가는 1937년 일제 치하의 평양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둘째인 그는 비교적 '좀 사는' 집안에서 자랐다고 한다."지금도 어렸을 때의 기억이 또렷해요. 당시 부친이 좀 잘 사셨어요. 덕분에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죠. 집 바로 뒤가 김일성대학이었습니다. 연애편지를 주고받고는 했는데, 그걸 전달하면서 자그마한 부수입을 얻기도 했습니다. 물론 돈을 바란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꼭 주니까 안 받을 수는 없었죠."평양서 살던 그가 남으로 내려온 것은 1951년 1월 14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중공군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정부가 수도 서울을 버리고 철수한 1·4후퇴 때다."전쟁이 나면서 난리가 났었죠. 저는 1·4후퇴 때 내려왔는데요. 사실 조금 더 빨리 내려올 수도 있었지만, 집이 좀 잘 살았었잖아요? 남들이 옷가지 몇 벌 챙겨서 떠나는 와중에 들고 갈 거는 챙기고, 못 가져오는 건 묻고 하다 보니까 내려오는 게 늦어졌어요. 이때 못 볼 거 참 많이 봤습니다.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쳐 내려오고 있는데 미군 사이에서 '인민군이 사복을 입고 내려온다'는 말이 돌았나 봐요. 그때 민간인들이 참 많이 죽었습니다. 끔찍했어요. 한 번은 너무 힘들어서 길에서 쓰러진 적이 있는데, 너무 졸려 잠에 빠지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제 앞에 있더라고요. 저는 쓰러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길 밑에 시체가 얼어있었어요. 깜짝 놀랐죠. 그거 보고 이를 악물고 다시 걸었습니다."아버지 영향으로 시작한 음악우여곡절 끝에 대전으로 온 김 연주가는 대전역 인근의 교회에서 주최한 위문공연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대전역 바로 옆의 중동교회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했었습니다. 출정식 같은 거죠. 어린 나이였던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연주밖에 없으니까, 병사들이 떠날 때까지 계속 연주했어요. 전쟁 중에 교회라고 사정이 좋았겠어요? 위문공연이라고 해봤자 뭐가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마이크 하나밖에 없고. 이걸로 위문공연을 할 수는 없으니 악기를 다루는 제가 계속 연주한 거죠. 저는 학교도 안 다녔으니까 온종일, 휴전될 때까지…."김흥식 아코디언 연주가.이미 그 시기부터 남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할 실력을 갖췄던 그는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고 한다."제가 음악을 시작한 건 아버지의 영향이에요. 아버지가 뛰어난 음악가셨거든요. 당시 손에 꼽히는 트롬본 연주가였습니다. 여러 악기를 배웠지만 어렸을 때 몸이 약해서 관악기는 못 했었어요. 기타도 손이 너무 아파서 못 했고…. 덕분에 피아노나 파이프 오르간을 했죠. 그러다가 아코디언을 시작했고요."아코디언 연주 경력이 길지만 다른 악기를 아예 못 다루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김흥식 연주가. 실제로 그는 건반 악기 전반에 대해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아코디언을 시작하게 된 것은 왜일까? 기자가 생각하기에 아코디언은 피아노나 오르간에 비해 대중적인 악기가 아니었다."물론 지금도 피아노는 하고 있습니다. 아코디언을 한 것은 제 개인적인 취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피아노의 원래 이름은 '피아노포르테(Pianoforte)'입니다. '약하게'라는 의미의 '피아노'와 '강하게'라는 의미의 '포르테'가 합쳐진 말이죠. 강약을 통해 소리를 표현하는 악기입니다. 반면에 아코디언은 소리의 떨림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에요. 감정의 전달이 원활한 악기라는 거죠. 아코디언의 뛰어난 감정 표현 능력에 빠져 아코디언을 시작하게 됐습니다."김흥식 아코디언 연주가.아코디언은 움직이면서 연주하는 악기연주가들은 저마다의 장르가 있다. 클래식이나 재즈, 현대가요 등이다. 하지만 김 연주가가 연주하는 음악의 장르는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아코디언으로 베토벤의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재즈를, 어떤 때는 영화에 수록된 OST를, 또 어떤 때는 현대 가요를. 그가 연주하는 음악의 원천은 어디일까."제가 연주하는 음악 장르는 러시아 음악입니다. 러시아 음악은 그 자체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음악이지만 우리나라 정서와도 잘 맞아요. 우리나라의 정서가 '한'이잖아요? 이게 음악에도 잘 녹아 있어요. 우리 음악에는 한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노래를 느리게 하는 경향이 있어요. 느린 음악이 더 슬프니까. 그런데 러시아 음악에서는 슬픈 노래를 빠른 템포로 연주해요. 이게 참 좋다고 생각해요. 빠른 템포로 연주하는 슬픈 노래를 듣다 보면 슬픔이 씻겨져 가는 것만 같거든요.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만은 없지 않느냐, 뭐 이런 느낌일까요?"오랜 시간에 걸쳐 노력한 결과, 지금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과 경력을 갖춘 김 연주가.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워가는 도중이라고 한다.김흥식 아코디언 연주가."음악뿐만이 아니라 삶은 항상 배움의 연속이에요. 젊은 시절 제가 음악 좀 한다 했지만, 해외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에 비해서는 부족한 면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보다도 한참 어린 친구들에게 재즈화성학을 배우며 공부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젊은 친구들에게 배울 게 많이 있고요."음악의 기본은 '귀', 청각이다.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일도 있다. 하지만 김 연주가가 연주를 시작하면 절대 눈을 감아선 안 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귀는 쫑긋하게, 눈을 부릅뜨고 있으라는 농담 섞인 말도 한다는데."제가 아코디언을 연주할 때 이리저리 움직여서 그런 거 같네요. 왜 그리 움직이면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느냐는 말을 종종 듣고는 해요. 그러면 저는 반문하죠. 왜 아코디언을 가만히 앉아서 연주하느냐고요. 아코디언은 들고 다니는, 움직일 수 있는 악기에요. 그런데 이걸 앉아서 연주하는 게 이상하잖아요?"얍! 활력천국현재 부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김흥식 씨. 그가 부산, 그리고 경남을 주 활동 무대로 정하게 된 것이 의아하다. 평양 출생의 그는 이곳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외할아버지가 충청도에서 목사 일을 하고 있었어요. 우선 거기가 피난 근거지가 돼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했죠. 그리고 부산에 와서 동아고등학교를 나온 뒤 동아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셔서 졸업을 못 했습니다. 소년가장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낮에만 공부하는 신학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이게 연이 돼서 지금까지도 신학대학 교수직을 하고 있죠."하루 1~2시간 정도밖에 못 자며 낮에는 대학에서 공부를, 밤에는 행사나 클럽 등에서 연주해 돈을 벌었다고 하는 김 연주가. 이때 배운 피아노 조율 실력이 수준급이라 조율사로서의 능력도 탁월하다고 한다. 현직 신학대학 실용음악 교수인 그는 고달팠던 과거의 기억을 웃음으로 넘겼다."그렇게 살다 보니 유명세가 퍼진 걸까요. 이곳저곳에서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중 하나가 '얍! 활력천국'입니다. 시골 마을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랑 이런저런 기획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죠. 아코디언 연주로 5년 정도를 고정출연 했었습니다."지금은 폐지됐지만 지방 방송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 중 최초로 전국 방송에 편성됐던 만큼 인기 있었던 프로그램인 '얍! 활력천국'. 연주가로서의 활동도 활동이지만, 시골의 노인들을 만나면서 옛 향수를 떠올리기도 했단다."방송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다 노인들이잖아요.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얘기했어요. 혹시 한국전쟁에 참여했는지, 대전역 앞에서 아코디언 연주하던 꼬마를 기억하는지. 대전역에서 위문공연을 하면서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들한테 꼭 다시 만나자고 했었는데 아직도 아무한테도 연락이 안 오네요…."교육자로서의 삶신학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김 연주가는 교육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다. 아니, 오히려 마주한 기자가 보기에는 본인의 연주 이상으로 교육에 대한 신념이 느껴졌다."기회는 언제든지 와요. 하지만 그때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기회는 지나가 버리죠. 저도 기회가 참 많이 왔었어요. 몇십 년 동안이나요. 그런데 이 기회들을 다 잡질 못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어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 기회가 오는 게 보이고, 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겠더라고요. 학생들이 자신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다양한 사람들이 김 연주가의 지도를 받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유명한 이가 있다. 해외 유수의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주목받고 있는 전유정 연주가가 그의 제자다."해인이는 피아노로 처음 만났어요. 아 개명을 했죠. 유정으로. 어린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데, 이 아이의 손이 피아노를 치기에는 너무 작은 거예요. 그래서 말했죠. 네 손이 너무 작아서 피아노를 치기에 적합한 손이 아니라고, 못할 건 없지만 힘들 거라고. 대신에 아코디언을 해보지 않겠느냐고요. 그리고 부모님이 동의해서 아코디언을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어하면서 연주를 하더군요."해외에서 활동하는 전 연주가는 '러시아의 영혼을 가진 음악가'라는 평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의 국립 우파예술대학에 진학한 그는 연주회에 가서도 자신을 지도한 사람 첫 번째에 '김흥식 사사'라고 하고 있다."참 고맙죠. 유정이의 연주를 들은 러시아 음악가의 요청으로 유학을 갔는데요. 그때부터는 제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었죠. 제가 하는 음악은 어디까지나 실용음악이고, 유정이가 이제부터 할 음악은 클래식이니까요. 제자를 기르면서도, 언젠가 떠나보낼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넓은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게 뿌듯하죠. 제 자랑거리입니다."그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재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많이 냈다."우리나라 교육은 붕어빵을 찍어내는 공장과도 같아요.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치죠. 하지만 인간은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손가락 길이도 달라요. 모두의 개성이 있잖아요. 저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개개인의 장기를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봐요. 꼭 활성화됐으면 좋겠어요."이후로도 계속 연주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아코디언을 들 수 없을 때가 오기 전까지 아코디언을 계속할 것이 뻔하기에. 그래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본인이 하는 음악 이외에,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고."무척 여러 가지에요. 지금 국내는 음악 치료의 불모지에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추세인데. 왜냐하면 교수들이 공부를 안 해서 그래요. 음악 치료를 한다는 교수들 강의실이나 인근에 가보면 담배꽁초가 한가득해요. 저는 그걸 무척 안 좋게 봐요. 교수들이 제 역할을 하고, 또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음악 치료를 제대로 봐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시도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실력에 상관없이 함께 연주하는 것'이에요. 실력의 차이가 나더라도 그 수준에 맞춰 같이 연주하면 좋은 음악이 될 수 있어요. 음악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닌, 일반인이 음악을 하는데 반드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음악이 대중화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악기 하나씩은 배웠으면 해요. 지금 사회가 참 어둡고 힘들잖아요. 그럴 때 힘이 되는 게 음악이에요. 스스로를 위해, 사회를 위해 악기 하나씩은 다뤘으면 좋겠어요."
16.08.18.'도레미파솔라'의 '미솔라'에서 따온 이름과 미소 띤 얼굴이 잘 어울린다. 이미소라(44) 사회복지사는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에 있는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공대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수학학원을 운영해 온 뼛속 깊은 공대생이었다. 그러다 덜컥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마치 원래부터 해야 했던 일처럼 사회복지사 일은 미소라 씨에게 아주 잘 맞았다. 새내기 사회복지사의 일과 꿈,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날 수 있다는 '깡통라디오'라는 독특한 이름의 모임 등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미소라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사회복지와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지금은 자연대라고 하는데 공대를 나왔어요. 결혼하고 나서 28세부터 수학학원을 15년 정도 운영했어요. 학원 수업은 오후에 시작하니까 오전에 시간이 많았어요. 성당에 다니니까 거기서 도시락배달 같은 것도 하고 관심은 약간 있었지만 그 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그랬던 미소라 씨는 사회복지 대학원에 입학한다. 시간과 거리적인 요건이 맞았던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서 야간과정으로 공부했는데 사회복지를 전공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그냥 어떤 건지 궁금했어요. 거제와 학교가 있는 진주를 왔다 갔다 했죠. 그러다 진주에서 선배가 하는 식물조직배양연구소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전공이 그쪽이니까 그 일이 너무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학원을 오래 하기도 했으니까요. 남편도 '그래, 하고 싶은 거 해라'(웃음) 그래서 진주로 왔어요."이미소라 사회복지사.연구소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학원을 운영할 때에는 일할 때는 일하고 시간이 나면 고민 없이 푹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연구소 일은 한시도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일 자체는 좋았는데 너무 얽매이게 되는 거예요. 계속 신경을 써야 하는 작업들을 하니까요. 선배가 저를 믿고 맡겨줬으니 주말에도 신경이 쓰여서 그걸 버리고 놀러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만뒀죠. 어떡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중에 진해에 있는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 모집 공고가 뜬 걸 봤어요. 휴직한 분 대신 1년 동안 일 할 수 있는 자리였죠."지역민들의 보배,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미소라 씨는 공부를 하면서도 사회복지 용어가 생소하고 간접적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배운 것을 현장에서 적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 기회가 온 것 같았다. 1년이라는 시간도 적당하게 느껴졌다. 덜컥 합격을 했다. 미소라 씨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 번 와본 적도 없는 진해에 왔다. 배치받은 곳은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 부설 노인복지센터. '1년 동안 좋은 경험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파이팅을 외쳤는데 상황은 생각지 못하게 돌아갔다. 입사하고 정확히 2주 만에 정직원 자리가 났다."복지관 내에 있는 진해 시니어클럽이라고, 어르신들 일자리 사업하는 곳에 자리가 나서 그쪽으로 가게 됐어요. 계속 복지사로서 일하게 된 거죠. 그렇게 일하다가 작년 2015년 1월 1일에는 여기 통합 사무실에 배치받아 왔어요. 그때부터 사례관리 업무를 맡았습니다."이미소라 사회복지사.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은 지역사회 복지서비스의 허브역할과 함께 넓고 다양한 활동을 벌인다. 복지사 업무의 꽃이라 불리는 사례관리 외에도 다문화가정지원사업, 밑반찬배달사업 등 복지관 업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비스제공 활동, 지역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사회조직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역아동센터와 진해노인복지센터, 그리고 기부받은 식품을 나누는 푸드뱅크를 운영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복지타운'이라고 해도 넘치는 말이 아닐 듯했다."한부모자조모임, 노인한글교실 같은 프로그램도 여러 가지 진행하고 있고요. 청소년들 방과 후에 와서 프로그램 하고 집에 귀가까지 시키는 청소년 방과 후 아카데미를 하고 청소년수련관도 따로 있어요. 노인을 위해서는 시니어클럽, 노인통합지원센터가 있고 저소득 주민들에게 자활서비스를 제공하는 자활센터가 있죠. 아, 장애아 전담 어린이집 보배어린이집도 있고요."미소라 씨와 함께 복지관을 둘러보았다. 경남에 있는 복지관 중에 유일하게 갖추고 있다는 체육시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수영, 헬스, 스쿼시, 사우나의 이용요금은 시세에 비해 아주 저렴했다. 요금만 내면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했다. 헬스장에서는 이미 많은 주민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 내 생활체육시설.대상자 개개인에 맞는 복지 행하는 일미소라 씨는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에서 사례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사례대상자를 선정한 후 대상자의 환경과 욕구를 세밀하게 파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복지관에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사례 관리를 진행한다. 미소라 씨는 사례 관리가 대상자의 강점을 찾고 사람다움과 사회다움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먹을 쌀이 없다고 쌀을 갖다 주고 끝내는 게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는 일이에요. 대상자의 개별성을 인정하고 지속성을 유지한다는 게 서비스 중심 복지와는 다른 점이죠. '이 사람이 왜 쌀을 살 돈이 없을까?' 의문을 가지고 대상자와 함께 환경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고 싶은지, 어떤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지 다양한 방향에서 접근하죠."대상자를 찾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주로 경찰서나 구청, 주민센터 등 여러 기관에 공문을 발송한다고 한다. 기초수급을 받는 사람들은 대상에서 제외한다."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을 찾는 거죠.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와요. 만약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가 좀 이상하다, 집에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조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연락이 오면 팀장님하고 방문해서 알아보고 직원분들과 회의를 해요. 그걸 통해서 사례관리에 들어갈지 결정을 하죠. 집중 사례, 일반 사례, 단순 사례가 있는데 나눠서 관리하고 있어요. 집중 사례는 한 복지사당 다섯 케이스를 하고 있어요. 한 케이스 하는 데도 엄청난 힘을 들여야 해서요."사회에서 가장 구석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라 미소라 씨는 가슴 아픈 기억이 많이 있다고 했다."사회복지사는 일과 마음을 분리해야 한다고 하는데요.(웃음)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그게 잘 안됐었어요. 구청에서 쌀이 없는 집이 있다고 전화가 왔어요. 혼자 봉고차를 몰고 나갔는데 쌀만 없는 게 아니었어요. 냉장고도 없고 그냥 집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이가 셋이나 있었는데요. 남편분은 일을 거의 안 하는 상태였고, 아이들 어머니를 만났는데 몸에는 뼈만 남아있었어요. 밥이 너무 먹고 싶은데 쌀이 없다고 그러셨어요. 눈물을 참느라 얘기를 더 이어가지도 못 할 정도였어요."더운 여름, 시원한 물 한 잔 마시지 못하는 가족의 참담한 환경은 충격적이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답답한 마음에 미소라 씨는 SNS를 통해 착잡한 마음을 글로 올렸다."다음 날 보니 댓글이 막 달리고, 도와주고 싶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어요. 많은 분들이 걱정해주시니 감동적이었죠. 냉장고도 후원을 받았어요. 다른 것보다 이 더운 여름에 냉장고도 없는 게 충격적이어서 냉장고부터 일단 들이고 하나하나 진행을 했죠."급한 상황을 해결하고 나서는 사례대상자와 대화를 시작한다. 사례 관리 일을 하면서 어떤 극한 상황보다 힘들 때는 사례대상자에게 변화할 의지가 없을 때라고 했다."우리도 주머니 사정 안 좋을 때는 밖에 안 나가려고 하잖아요.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은 보통 형편이 극도로 안 좋은 분들이 많으니까 집에 그냥 있으려고 해요. 우울증처럼 계속 파고드시는 분들, 개선 의지가 없으신 분들…. 그런 케이스가 힘들어요. 만나고 와서도 다음 날 연락이 안 되면 바로 찾아가서 봬야 마음이 놓이고요. 일단 그분들을 밖으로 끄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둘레 사람을 만들어 드리는 작업도요. 이웃들과 교류하지 않는 분들이 많거든요. 가족이 있어도 안 만나던 분이라면 가족과 만나게 하고요."이미소라 사회복지사.사례관리대상자 스스로 만든 자조모임 '깡통라디오'미소라 씨는 주민공동체 '깡통라디오'를 자주 언급했다. 깡통라디오는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 사례관리대상자들이 스스로 만든 자조모임의 이름이라고 했다. 집에만 갇혀있던 사례대상자들이 복지관을 만나 사회와 소통하게 되었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그분들은 여전히 힘들어요. 중요한 건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가 생긴 거죠. 모여서 삶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교류하면서 긍정적 영향을 받죠. 한 달에 두 번 모여요. 한 번은 모이는 분들께 어떤 것을 배우고 싶은지 여쭤보고 강사를 섭외해서 교육받으실 수 있게 하고, 또 한 번은 오셔서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고, 틈틈이 DIY 제품 같은 것도 만들어요."'깡통라디오'는 1962년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이라는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라디오다. 문맹으로 잡지나 신문을 읽을 수 없고, 전력조차 구할 수 없는 개발도상국 빈민들은 외부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빅터 파파넥은 사람들이 버린 깡통을 밑 재료로 하고 밀랍이나 배설물로 동력을 얻어 사용할 수 있는 라디오를 만들었다."사례대상자 중 한 분이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우리 모임이 세상과 소통하는 마음으로 하는 모임이니까 '깡통라디오'라고 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정했어요.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요. 다들 친하게 잘 지내고 적극적이세요. 한부모가정인 경우가 많은데 아이들도 다 데리고 와요."'깡통라디오' 멤버들은 자활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드라이플라워, 석고방향제 같은 것을 시간이 날 때마다 열심히 만든다."만드신 것들을 복지관 로비에서 팔아봤는데 너무 잘 팔리는 거예요. 거기서 또 희망을 얻었죠. '하니까 되더라' 이런 용기가 생기는 거예요. 저 없이도 자조모임 분들이 시장조사 삼아(웃음) 프리마켓 구경을 다녀오시고 그러더라고요. 너무 대견하고 좋았죠. '깡통라디오' 전에는 '기적질문프로젝트'라는 걸 했어요. 말 그대로 질문을 해요.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물으면 '기적이 일어나겠나?' 하시면서도 얘기를 해주세요. 대부분 말씀하시는 게 가족과 여행을 가고 싶다는 거예요. 여행을 가지 못한 가족, 놀이동산을 가보지 못한 아이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럼 저희가 그 기적을 만들어드리는 거죠."할머니 혼자 아이 넷을 키우는 집이 있었다. 아이들 아빠는 지적장애가 있고 엄마는 세상을 떠났지만,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죽었다는 말을 아직 하지 못했다."할머니가 너무나 아이들을 사랑하셨어요. 아이들이 기차를 한 번도 못 타본 게 마음에 걸리셨나 봐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진주에 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할머니 고향인 남해로 가서 여행을 했어요. 너무 뭉클했어요. 여행 전에는 가족회의를 통해서 여행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그 과정에서 가족끼리 소통을 하는 거죠. 굉장히 긍정적인 효과를 많이 봤죠."'깡통라디오' 멤버들은 활기차게 활동을 구상하고 있다. 팟캐스트 출연 계획도 세웠다."팟캐스트 '우리가 남이가' 출연 계획이 있어요. 이분들은 어떻게 보면 사회적 약자인데, 잘 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도 라디오 녹음 한번 해볼 수 있잖아요. 다른 분들이 할 수 없는 얘기를 이분들이 들려주실 수 있잖아요. 자존감도 높아지고 책임감도 더해지실 것 같아요. 힘든 상황이라고 가라앉아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라디오 녹음도 하는 자기들을 보고 다른 힘든 분들이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얘기하세요. 아마 7월 말쯤 할 것 같아요. 오후에 봉고차로 모셔가서 근처 번화가 구경하고 밥도 먹고 그렇게 하고 싶어요. 신나는 추억을 만드는 것처럼요."깡통라디오 멤버들이 직접 만든 드라이플라워 소품.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 제공노인 문화 공간 만들고 싶다"다시 태어나면 사회복지사를 더 빨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웃음) 이 일에 만족해요. 일을 할수록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 날 때마다 인문학이나 다른 공부도 하는데 다방면을 알아야 제대로 된 복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미소라 씨는 다른 사회복지사들과 교류하는 데에도 열심이다. 경남에서 일하는 복지사들 중 마음 맞는 이들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사가연(사회복지 가치실현을 위한 연구모임)', 밀양에서 복지 일을 하는 사람들과 복지요결이라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책사넷(책을 사랑하는 네트워크 모임)'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미소라 씨에게는 선명한 목표가 하나 있다."제가 복지관에 취업하기 전에 부모님이 두 분 다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셨어요. 갑자기 고아가 된 거예요. 남편도, 가족도 있었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다 진해에 왔는데 종합복지관 소속이 되기 전에 일했던 시니어클럽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하게 됐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된 때라 어르신들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정이 너무 많이 갔어요. 진짜 엄마, 아빠 같고…. 근데 일 년 만에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어요. 어르신들도 우시고 저도 울고 그랬죠."그곳에서 그려오던 계획이 있었다."제주도에 못 가본 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젊은 사람들이야 요즘 제주도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수 있잖아요. 어르신 중에 누가 계 모임에서 다녀오시면 너무 부러워하시는 그 모습들을 잊을 수 없어서 내년에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웃음) 제주도 모시고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발령이 나서 약속을 지키지 못 했어요. 늘 마음의 짐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걸 생각하게 됐어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놀 공간이 많잖아요. 근데 어르신들이 가실만한 곳은 복지관이나 경로당밖에 없어요. 그래서 공간을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컨테이너부터 시작하더라도 비 오면 부침개도 부쳐 먹고 소통할 수 있는 어르신 문화 공간이요."
16.08.09.시집 두 권을 들고 활짝 웃어 보였다. 이야기 도중에는 간간이 눈시울을 적셨다. 다시 마지막에는 '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며 미소 지었다. 경남경찰청 정보화장비과에 근무하는 박종득(58) 경위는 "모처럼 옛이야기를 해본다"며 굴곡 많은 지난 시간을 담담하게 끄집어냈다.통신분야 전문가박종득 경위가 근무하고 있는 경남경찰청 정보화장비과는 '통신', '장비'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박 경위는 30여 년 경찰 생활 대부분 통신분야를 맡았다.도내 경찰이 사용하는 무전기·업무조회기 등 1만 개 넘는 무선기기 전체를 관장하는 일이다. 수리하는 일 또한 포함해 있다. 아침에 출근하면 도내 전체 112시스템을 확인한다. 도내 23개 경찰서 서버에 이상 없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또한 집회 현장에서는 무전이 필수이기에 이를 관리하는 것 또한 중요 업무다."싱크로나이즈 선수가 얼굴은 웃고 있지만 물 아래서는 발을 엄청나게 움직이잖아요, 제가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매일 알게 모르게 점검하고 지원하는 업무죠. 1987년 첫 발령지가 경남경찰청 정보통신담당관실 무선정비실이었습니다. 무전기 시설이 거의 없던 시절입니다. 15명이 도내 전 파출소를 다니며 설치하는 작업에 구슬땀을 흘렸죠. 무선통신 기술이 있다 보니 한번은 도지사 관용차량에 전화기를 설치하러 갔습니다. 잘못하다 기름탱크를 건드려서 차를 못 쓰게 될 뻔했죠. 지금이야 웃지만 그때는 등골 오싹했습니다."박종득 정보화장비과 경위.창원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몸이 왜소했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징용으로 골병든 것이 이유일 것이라 받아들였다. 체격이 작다 보니 시비 거는 친구도 많았다. 육상·태권도·럭비 등 운동을 닥치는 대로 했다. 군인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학 진학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경남직업훈련소에 들어갔는데 '통신전자'를 전공분야로 택했다. 강렬했던 기억 때문이다."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미군 부대서 얻은 무선마이크가 있었습니다. 선이 없는 물건에서 스피커를 타고 소리 난다는 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건 정말 획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고 꼭 배워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거죠."그는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책을 놓았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 2000년 창원기능대학(현 한국폴리텍 7대학) 전자과를 졸업했고, 무선설비 기사 등 5개 자격증을 땄다. 경찰 조직에서 하는 통신 관련 각종 경진대회 수상 경력도 당연했다.아내, 그리고 아내박종득 경위는 경찰 생활을 해경에서 시작했다. 4년간 근무하다 일반경찰로 옮겼다. 모든 이유는 아내에게 있다."1977년 친구 소개로 집사람을 만났습니다. 늘 책을 들고 다니더군요. 그 모습에 반하게 됐죠. 알고 보니 세상에서 제일 책을 안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나한테 잘 보이려고 양장본을 들고만 다녔던 거였죠. 하하하. 군대 다녀온 후 1981년 8월에 결혼식을 올렸죠."이듬해 첫 아이를 낳았다. 이후 아내는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고 했다. 병원을 찾았더니 류머티스인데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고 했다. 약도 제대로 처방해 주지 않았다. '돌팔이 의사'라 욕했지만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내에게 도움될 만한 건 모두 찾아서 먹였다. 현실적인 문제 또한 가로막고 있었다."전 국민 의료보험 시행 전이었습니다. 치료비 감당이 안 되더군요. 의료보험 혜택이 너무 절박해서 알아보니 해양경찰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곧바로 시험 준비해서 합격한 거죠. 남들처럼 투철한 국가관·직업관 때문이 아니라 아내 병원비를 위해 입문한 셈이죠."해양경찰이다 보니 경비정 타고 먼바다 나갈 일이 많았다. 일주일씩 집을 비우는 건 예사였다. 아내를 보살펴야 했던 그로서는 다시 결심해야 했다. 1987년 사표를 던진 후 일반경찰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박종득 정보화장비과 경위.그렇게 아내를 위한 삶을 이어오던 중, 또 한 번 청천벽력같은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2013년 아내 자궁 쪽에 암이 발견됐습니다. 수술했지만 몇 달 후 암세포가 퍼져 머리카락이 다 빠질 정도였습니다. 재수술하면서 장기도 많이 제거했죠. 이후 항암치료 하는데 산 사람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내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의사가 포기하면 신이 있고, 신이 포기하면 내가 있다. 내가 절대 안 보낸다'고 말이죠."현재 아내는 여전히 그를, 그는 여전히 아내 곁을 지키고 있다. 3년 전과 비교하면 그래도 감사한 지금이라고 한다. 두 딸 모두 결혼해 오로지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매일 아침 5시 10분에 일어나면 아내 물을 먹이고 찜질해 주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그리고 108배를 잊지 않는다."아내가 차려주지 않으면 밥을 안 먹습니다. 매정한 것 같지만 아프다고 가만히 두면 더 무기력해집니다. 아내 스스로 하게끔 힘을 키워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나 스스로를 늘 참회하고, 대자연을 향해 빌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 주고, 신이 있으면 헤아려 달라'고 말이죠. 아내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내에게만 원인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연을 맺은 저한테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겠지요."시인 박종득박종득 경위는 시인이다. 2004년 한국문인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머물지 않음은 떠남이리라> <못다 부른 노래> 두 권을 냈다."나이 들면 들수록 향기나는 분야가 어딜까요? 예술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그러하고요. 인생 2막을 즐거운 향기로 장식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서툰 발자취도 남기고 싶었고요. 그렇게 습작을 시작하게 된 거죠."시인 채수영은 '시인 박종득'에 대해 '봄 이미지 시인, 정적인 시인, 자연의 조화를 아는 순수자연시인'이라고 평했다.박 경위는 직원들과 바깥나들이를 가면 그 분위기에 걸맞은 시를 읊어준다.현재도 틈틈이 글을 쓴다. 하지만 10여 년 가까이 시집 발간은 멈춰있다."새 시집을 낼만큼 써놓은 글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정신이 없습니다. 집사람이 아프기도 하고…."그는 대신 아내를 담은 시 하나를 소개했다. 제목은 '류머티스'다.불청객의 방문으로/새벽은 비상이다/꼭꼭 걸어 잠근 문/어디로 들어 왔단 말인가/보일러 온도만큼/문지방을 드나드는 횟수만큼/아내의 아픔도/나의 안쓰러움도 높아간다/데운 수건을 들고 오가기를 한참/겨우 내쫓고/눈을 붙이는 아내/하루가 열리고/해 구멍이 찢어지면/어김없이 다시 찾아온다/바보가 되어가는/나의 아침/후줄근한 출근길/자꾸 뒤가 돌아 보인다/눈에 밟힌다자신도 암을 이겨내다참 얄궂은 일이었다. 박종득 경위는 어느 날 자신에게도 병이 찾아온 걸 알았다. 암이었다."2006년 업무 때문에 고성을 찾았다가 절 아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주인이 '당신은 수술하면 죽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소린가 했죠. 1년 후 병원에 갔는데 위암이라더군요. 못 미더워 부산백병원에 갔지만 마찬가지 대답이었습니다. 그때 기분은 뭐랄까, 연한 풀을 삶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 생명은 내가 살리기로 했습니다. 수술을 선택하지 않고 고성 식당에서 만났던 기인을 다시 찾았습니다. 구지뽕 같은 것으로 만든 약을 지어주기에 먹었습니다. 그사이 휴가 한번 안 내고 일도 평소처럼 했습니다. 100일 후 병원에서 CT를 찍었는데요, 위가 어린아이 것처럼 깨끗해져 있었습니다. 의사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때 참 많이 울었습니다…."이제는 '힐링코드'라는 건강법으로 자신과 아내를 돌보고 있다. 한 목사가 10여 년간 우울증을 앓던 아내 병을 고치고자 노력한 끝에 찾아낸 치유법이다."사람을 이루는 건 몸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합쳐진 것입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은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운동장에 나가 힐링코드를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시집을 들고 있는 박종득 정보화장비과 경위.그는 2018년 퇴직 후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기 위해 틈틈이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희망을 놓아버린 사람들에게 손 내미는 일도 일상적으로 하고픈 마음이다."영혼이 힘든 사람이 있다면 안내해 주고 싶습니다. 건강이 힘든 사람에게는 음식으로 치유하는 방법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능력만 된다면 약값도 베풀고 싶네요."그가 쓴 시집에는 네잎클로버 여러 개가 꽂혀 있다. 평소 네잎클로버가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온다고 한다. 녹록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긍정의 힘 때문일 것이다.그는 술자리에서 하는 건배사가 있다고 한다."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16.08.04.계곡 물속에 물고기가 유유히 노니는 것 같다. 거친 질감을 표현하고자 돌출되게 특수한 재료를 쓴 유화 그림은 입체적이다. 떨어져서 그림을 바라보면 더욱 생동감이 느껴진다. 박배덕(68) 작가의 작품이다. 창원상공회의소 1층 챔버갤러리 박배덕 작가 초대전에서 그의 작품 10여 점을 접할 수 있다. 작가는 뉴욕아트페어대상 반기문 UN사무총장상, 경남전업미술인상, 진해예술인대상 등 다수 수상 기록이 있다. 전시는 오는 29일까지다. 지난 21일 창원시 진해구 소사로 59번길에 있는 작가의 갤러리에서 그를 만났다.-'박배덕 갤러리마당' 실내·외 전시장에 입체·평면 작품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그동안 만든 입체, 평면 작품을 두루 볼 수 있게 갤러리를 꾸몄다. 표시해둔 전시 동선을 따라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사진도 찍을 수 있게 포토존도 곳곳에 마련해뒀다. 나는 이곳에서 작품 작업을 한다."-줄곧 진해에서 작업을 해왔나?"고향이 진해다. 서울, 부산에서 작업을 하다 마흔 살이 넘어서 진해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작업을 한 지는 6∼7년 됐다. 이 갤러리 이전에는 진해예술촌에도 있었고, 진해 산자락의 비닐하우스에서도 작품을 만들었다. 이곳은 폐가를 빌려 수리해서 작업실 겸 갤러리로 꾸몄다."창원시 진해구 소사동 '박배덕 갤러리마당'에서 만난 박배덕 작가. /우귀화 기자-이번 챔버갤러리 전시 작품뿐만 아니라 최근 작품을 보면 평면 작품을 굉장히 입체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다."재료비가 적게 들면서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최근 작품 형태인 부조(浮彫)형 그림을 만들어냈다. 마티에르를 느낄 수 있게 촉감도, 시각도 다르게 만들고자 했다. 알루미늄 망으로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그 위에 표면처리를 한 뒤 유화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 위에 6번씩 점을 찍어서 질감을 살리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일반 작품보다 6배 더 많은 공이 든다."-1980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개인전만 30여 회에 이른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한다면?"작품 활동한 지 40년가량 됐다. 최근 작품 경향은 6년간 재료 연구 끝에 탄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자연과의 만남'을 유화로 표현했고, 이후 '프리즘 현상과의 만남' 등을 주제로 작업을 했다. 그러다 풍류를 즐긴 아버지의 모습을 작품에 녹여내 '한국 고전음악과 우리 춤사위의 만남'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후 '평면 탈피와 자연색채와의 만남', '대비 관계에서 오는 입체적 상황'을 작품으로 표현할 때는 어머니를 작품 속에 표현했다."박배덕 작가의 작품 '기원의 흔적'.-챔버갤러리 전시에서도 어머니를 표현한 작품을 볼 수 있나?"그렇다. '기원의 흔적'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어머니의 흔적을 표현한 것이다. 계곡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사과를 접시에 올려두고 기원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예전에는 어머니들이 그렇게 기도를 올린 후 사과를 계곡물에 떨어뜨렸다. 작품 속 물은 어머니를, 돌은 우주를 상징한다."-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지금 이 공간은 빌린 공간이어서 계속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새로운 곳에 독자적인 공간을 만들어서 '힐링' 전시장으로 꾸미고자 한다. 예술을 대중에게 잘 전달하고, 작가로서 작업을 잘 해나가는 것이 예술가로서 살아남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16.07.28.